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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방짜유기박물관 DAEGU BANGJJA YUGI(KOREN BRONZEWARE MUSEUM)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유기를 사용하였는데 현재 출토되고 있는 각종 청동기 유물에서 당시의 유기 제조기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스키타이’청동기문화와 관련이 있는 북방계의 ‘오르도스-요령지방’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조문경(粗文鏡)을 제작하였고, 후기가 되면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독자적으로 주조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세문경(細文鏡), 방울, 의식구를 비롯한 각종의 도구를 제작하였다.

그 후 철기시대가 되면 청동기는 얼마동안 철기와 공존하다가 점차 사라지게 되며, 삼국시대부터 다시 발달하기 시작한다. 백제의 경우 일본에 제련 및 세공기술을 전해주었음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으며, 무령왕릉(525)의 왕비 머리 부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대발(大鉢)은 청동으로 제작한 발우이다. 또한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신라에는 경덕왕(742~765) 이전부터 철유전이라는 기관을 두고 철과 유석을 관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속의 재료 면이나 기술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때였다. 당시의 뛰어난 제조기술은 백률사 약사여래상, 상원사 동종(725), 성덕대왕 신종(771) 등 많은 불교미술품 등을 통해 볼 때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빛깔이 고운 ‘고려동’을 생산하여 중국과 교역을 하였다. 제작기술도 발전하여 불상이나 각종 불교용구, 생활용기, 동활자를 비롯하여, 말기에는 화포 등 다양한 종류의 기물을 제작하였다. 왕족과 귀족은 방자기법으로 제작한 얇고 질긴 청동그릇을 식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에서 채굴에 힘을 썼으며, 『경국대전』에 의하면 국가에서 쓰는 유기를 만드는 유장(鍮匠)을 중앙 장인인 경공장(京工匠)으로 공조(工曹)에 8명, 상의원(尙衣院)에 4명을 두었고, 지방관아에 필요한 유기를 만드는 외공장(外工匠)도 상당수 배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정책의 영향으로 불교적 색채를 띠는 금공품이 많지 않았던 반면 담배함, 화로, 향로, 반상기 등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주는 형태의 생활용품과 민예품이 많이 제작되었다. 자기를 대중적인 식기로 쓰던 시대였음에도 유기는 고려시대에 이어 상류층에서 식기로 사용하였으며,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도 생활 용구로 사용되어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고 시장을 형성하였다.

근대 말에는 일본에 의한 유기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각 가정에서 소유한 거의 모든 유기들을 수탈당하였다. 그 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유기는 다시 성행하기 시작하였으나 6·25 이후 연탄을 사용하면서부터 연탄가스에 변색되기 쉬운 놋그릇 대신 스테인리스 그릇을 선호하여 유기는 점차 사라졌다. 그러던 것이 최근 각종 실험을 통해 병원균 O-157 살균기능, 농약성분 검출기능 등이 밝혀지면서 부각되고 있으며, 현재 식기, 악기, 제기 및 각종 생활용품 등으로 제작되고 있다.

자료 담당자 :
방짜유기박물관 Tel. 053-430-7923
최근자료수정일 :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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